낙제생 수퍼우먼
집안의 초등학교 6년생인 손녀가 나를 위해 만든 크리스마스카드에 담은 말은 “할머니는 좀 놀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이었다. 9월 중순부터 100일간 열리는 정기국회가 성탄절에 끝나게 되어 있어 경황이 없던 할머니가 어린 마음에도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60세가 된 지금까지 여러 형태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독신으로서의 직장 생활을 상당기간 했으며, 결혼 후에는 직장생활을 계속해서 가정과 직장에 동시에 봉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기도 한다. 그리고 어린애가 태어나면서 한 때는 전담 주부로서 가사만을 돌보기도 했고, 또 한 때는 가사를 겸해서 무보수로 사회운동에 참여해본 적도 있다. 지금의 나는 가사는 물론 사적인 생활은 뒷전으로 할 수밖에 없는 공적인 역할만이 강요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침 일이 끝날 무렵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서 한 잔의 차를 마시던 비밀스런 나만의 순간도 지금은 나의 것이 아니며, 계절마다 별미를 만들어서 인척들, 친구들,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나누면서 담소하던 나의 취미이자 즐거움이었던 일도 하지 못하게 된지 오래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주부의 의무로 되어 있는 김장도 때를 놓치기가 일쑤이며, 어느 한 해는 아예 김장을 하지 못한 겨울도 있었다. 그것도 몇 포기 김장이 아니라 7~8개의 독을 채워야 하는 김장을 말이다.
우리 집은 원래 교수인 남편이 항상 밖의 일을 더 많이 하는 나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더 길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은 안씨이고 나는 박씨인 것을 빗대서, 남편이 자기는 안 사람이고 내가 바깥사람이라고 농담을 해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한다. 그런 남편이 하루는 가족과 차분하게 대화할 수 없는 내 생활을 지켜보면서 국회의원들 부인 중에서 이혼하자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다고 말했다.
나도 언제까지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수퍼우먼’을 동경했고,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 열심히 해보기도 했는데, 내가 그런 위인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는 데 그쳤다. 두 가지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한 가지만 할 때처럼 기대를 하는 것은 얼마나 무리인가. 이러한 반성은 사회와 직장인으로서 지칠 대로 지친 남편에게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을 100% 다 하라고 강요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난번 나의 연말연시는 손님맞이 등으로 몸은 더 고달팠지만 내 손녀의 소원대로 나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변화된 분위기가 작용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내 친구 중 한 해에 한번 가족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나는 용감한 주부가 있었다. 그 1주 동안에 1년을 버틸 수 있는 활력을 충전하기 위한 것이란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도 이 친구의 용기를 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_1992
“새로운 리더십으로 쇄신의 노력을 거듭하는
여성 활동가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여러분이 새 시대의 리더이다.
거침없이 당당하게 길을 열어 가기를 바란다.”












